역사

BC4000〜BC1000 바다에서 활발히 활동한 죠오몬(縄文)인이 살고 있었다.

야쿠시마에서 발견된 죠오몬시대 유적을 보면 야쿠시마에는 큐우슈우(九州)본토에서, 오오스미쇼토오(大隅諸島),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 오키나와(沖縄)까지 널리 교역하며 바다에서 활발히 활동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53년 당(唐)의 고승, 감진(鑑真)이 계절풍을 피해 야쿠시마에 기항하다.

당(唐)의 고승, 감진(鑑真)은 5번이나 바다를 건너려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하고, 결국, 양쪽눈을 실명한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6번째의 시도에서 겨우 일본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1000년경 수필 “마쿠라노 소오시(枕の草子)”에 등장하는 야광조개

헤이안지다이(平安時代; 794-1185년)의 여류작가, 세이쇼오 나곤(清少納言)의 수필“마쿠라노 소오시”에, 야광조개를 술잔으로 했다는 기술이 있다. 헤이안시대 야쿠시마는 야광조개를 일본조정에 헌상하였다.

1488년、쿄오토(京都) 혼노오지(本能寺)의 니치조오(日増)스님이 찾아오다

쿄오토(京都) 혼노오지(本能寺)의 니치조오(日増)스님이 섬을 찾아와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의 정상에 있는 암굴에 법화경(法華経)의 법령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의 비석 “입뽕호오쥬다이공겐(一品宝珠大権現)”은, 섬의 수호신・히코호호데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의 불명(仏名)이다. 비석은 산악신앙의 영지를 표시하는데, 이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풍습인 “타케마이리(산악참배)”의 시작이라고 한다.

1543년 총포전래. 일본에서 맨처음 사용된 곳은 야쿠시마였다.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중국 배에 승선했던 포르투갈인이 화승총형의 총포를 전했다. 전래된 총이 실전으로 최초에 사용된 것은 , 야쿠시마에서 일어난 싸움이었다라고 향토사학자는 전하고 있다.

1586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야쿠스기의 목재 조달을 명하다.

전국시대의 무장,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쿄오토(京都) 호오코오지(方広寺) 에 대불전(大仏殿)을 세우기 위해서, 당시 야쿠시마를 다스리고 있던 시마즈한(島津藩)에 목재를 조달하라고 명했는데, 목적은 야쿠삼나무와 노송나무였다. 그 때의 벌채된 나무는 200그루라고 전해진다.

1640년경 토마리죠치쿠(泊如竹)스님에 의해 야쿠삼나무의 활용이 시작되다

야쿠 삼나무는 원래 신으로서 숭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민들은 벌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도지다이(江戸時代; 1603-1868년)에 들어가, 야쿠시마 출신이자 유학자(儒学者)인 토마리 죠치쿠(泊如竹)스님이 야쿠시마 도민들의 빈곤을 보고, 야쿠삼나무의 벌채를 도민들에 권한 것을 계기로 1640년경부터 본격적인 벌채가 시작되었다.

1708년 이탈리아인 선교사 시돗티(Giovanni Battista Sidotti) 가 오다

야쿠시마에서 이탈리아인 선교사 시돗티 신부의 밀입국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에도(江戸)에 호송되어, 주자학자(朱子学者)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만났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시돗티와의 회견 후 “서양기문(西洋紀聞)”을 썼다. 에도지다이(江戸時代 )말기의 개국론자들은 이 서적을 읽고 일본정신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배우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시돗티가 상륙한 코시마(小島)라는 마을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812년 이노오 타다타카(伊能忠敬)가 오다

측량사 이노오 타다타카(伊能忠敬)가 섬을 측량했다. 에도막부(江戸幕府)는 국방상의 이유로 전국 연안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1821년에 완성한 “일본연안해흥전도(大日本沿岸海興全図)”는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였다.

1882년 지조개정(地租改正)으로 섬의 면적 80%를 국유지로 편입

지조개정(메이지 정부가 시행한 토지개혁)으로 에도시대부터 각 부락이 공유산림으로 이용해 왔던 산림의 대부분이 국유림으로 지정됐다. 일상생활에 사용한 땔감 재료도 마음대로 사용 못하는 상황이 된 도민들은, 국유림을 돌려달라는 청구소송을 일으켰다.

1914년 식물학자 E.H.윌슨 박사가 야쿠시마 조사를 위해 오다

식물학자 E.H.윌슨박사는 일본조사 중 제일 먼저 야쿠시마의 식물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세계에 야쿠시마의 숲과 삼나무를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직경4.39m의 야쿠스기의 그루터기였는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 그루터기를 윌슨카부(ウィルソン株/윌슨 그루터기)라고 부르게 됐다.

1921년 야쿠시마국유림경영대망(屋久島国有林経営大綱)(야쿠시마헌법/屋久島憲法)발표

오랜 세월에 걸친 국유림 반환 청구소송은 인정 받지 못했지만, 정부는 도민들의 힘든 상황을 고려하여, 야쿠시마국유림경영대망(야쿠시마헌법)을 발포해서, 마에다케(前岳)부분을 지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도록 했다.

1922년 야쿠시마 국유림 개발 시작

국유림 개발의 거점으로서 표고 640m 지점에 있는 코스기다니(小杉谷)에 벌채를 위한 기지를 설치. 삼림개발 전진기지로서 1970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최전성기이었던 1965년 당시는, 133가구 540명이 코스기다니(小杉谷), 이시즈카(石塚) 부락에서 생활했다.

1964년 야쿠시마가 키리시마 국립공원(霧島国立公園)에 추가되다

3월16일, 키리시마 국립 공원에 추가편입되어, 키리시마-야쿠 국립공원의 일부가 되었다. 2007 년에는 쿠치노에라부지마(口永良部島)가 편입되었다. 그 후 2012년3월에는 쿠치노에라부지마와 함께 야쿠시마 국립공원으로 분할되어, 단독으로 일본에서 30번째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1966년 죠오몬스기가 발견되다

“죠오몬스기( 죠오몬삼나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시 추정된 수령이4,000년이상으로 죠오몬시대 부터 서식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명명됐다는 설과, 자유분방하게 꾸불꾸불한 줄기의 모양이 죠오몬토기와 닮아 있기 때문에 명명됐다는설이 있다.(위키백과 일본어판에서 발췌. 최종갱신2013년9월7윌 (토) 12:57)

1993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되다

아키타켕(秋田県)에 있는 시라카미산치(白神山地)와 함께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연유산으로서 세계유산등록리스트에 등록되었다. 야쿠시마의 유산등록지는 섬전체의 약 20 %인 10,747ha이다.

2001년 천연 야쿠 삼나무의 벌채 종료

각종 보호구역 이외의 국유림에서는 벌채 가능한 구역이 감소하여 천연 야쿠스기의 벌채는 종료되었다. 현재 기념품 등의 가공이나 목공예에 사용되고 있는 야쿠스기는 도마이보쿠(土埋木)라고 불리는, 이전에 벌채된 나무의 그루터기나 태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2005년 나가타하마(永田浜)가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다

제9회 “람사르 조약 체약국회의”에서 야쿠시마 서부의 해안인 나가타하마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리스트”에 등록되었다. 나가타하마는, 북태평양 주변에서 붉은바다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가장 많이 상륙하는 모래사장으로서, 조약습지의 국제기준에 달한다고 인정되어 등록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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